영화 <암살>의 자동차들,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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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자동차들, 숨겨진 이야기
  • 김남진 (카 큐레이터)
  • 승인 2015.11.0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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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영화 <암살>을 더욱 사실감 있게 만들어준 포드 모델 T와 A, 그리고 링컨 K. 이들을 미국에서 직접 발굴하고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운영한 김남진 카큐레이터가 직접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비하인드 스토리
 

작년 봄, 영화사 ‘케이퍼필름’에서 <암살>이란 영화를 만들려 하는데 소품으로 쓸 자동차들이 필요하다고 연락해왔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이 주요 무대로 영화 속에서 자동차들의 비중이 클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의 자동차들을 구하고 촬영 기간 동안 운영하는 일을 해보자고 했다.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냉큼 “같이 해보십시다.” 하고야 말았다. 고락의 서막이었다.

제작부서 담당자는 당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차들 중 등장인물 혹은 장면에 어울리며 혹독한 액션 신도 견딜 수 있는 모델을 원한다고 했다. 물론 가격이 적당해야 한다는 단서도 빠지지 않았다. 
 

30년대 경성의 생활상, 특히 자동차의 보급과 이용 상황은 어땠는지에 대하여는 충분치는 않아도 적당히 필요한 만큼의 자료들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결론은 포드였다. 아직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어 구입가격이 적절하고 부품을 대기도 수월해서 영화에 쓰기에는 적격이었다. 물론 당시 국내에도 상당한 포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토요타가 그들 최초의 승용차를 만든 때가 1936년이었으므로 조선의 일본인들이 외국차를 사다 쓰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토요타의 생산량도 무척 미미했다.) 물론 조선의 독자적인 수요 또한 있었다.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친일파 거두를 제거하려는 요원들이 쓸 차로는 포드 모델 T 디포핵(Depot Hack)을 골랐다. 모델 T는 1908년부터 27년까지 다양한 보디 형태로 <암살>의 최종 관객 수(1,269만명)보다 많은 1,500만대가 팔린 미국 자동차 대중화의 주역이다. 디포핵은 픽업트럭 형태로 차주의 필요에 따라 뒷좌석과 짐칸을 다양하게 변형해 쓸 수 있는 모델이었다. 가난한 식민지의 비밀 요원들이 튀지 않으며 작전에 쓰기에는 제격이었다. 
 

일제의 헌병대, 경찰 등에서 관용차로 쓰이며 많은 카 액션을 선보일 차로는 모델 T보다 신형인 모델 A, 그중에서도 4도어 세단 모델을 골랐다. 극중에서 대부분 4명이 타는데 모양이 좀 더 매끈하다 해서 2도어 쿠페를 고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친일 행각으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지닌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의 차로는 포드의 고급차 디비전인 링컨의 모델 K로 낙점했다. 12기통의 대형 리무진으로서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모자람이 없는 차였다. 
 

수소문 끝에 넉 대의 후보 차들을 골랐다. 상태를 살피고 합격이면 한국으로 보내는 절차를 밟기 위해 차가 있는 미국으로 출장길에 올랐다. 1924년 모델 T는 뉴욕 주, 1929년 모델 A 한 대는 미주리 주, 다른 1929년 한 대는 일리노이 주, 1936년 링컨 K는 조지아 주에 있었다. 해당 차들은 등록되어 운행을 하는 차들로서 기본적 성능은 내주었다.
 

이제 이들은 컨테이너에 실려 한국으로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선적을 기다리던 중 불안한 소식이 들렸다. 미국의 서해안 항구들의 항운노조가 파업을 시작하며 미 서해안의 물류에 심각한 병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 촬영은 9월 중순에 시작한다고 했는데 선적 소식은 들리지 않은 채 하염없이 시간만 흘렀다. 다행히 8월 중순께 부산에 들어와 통관을 하고 촬영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2014년 9월 중순, 파주 모처에서 포드 모델 A 2대가 투입되는 촬영 첫날, 꿈에서도 생기지 말았어야 할 상황이 현실에서 생기고야 만다. 전날 밤에도 시동과 주행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였지만 막상 현장에서 한 대의 모델 A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최동훈 감독과 제작진들은 행여 시동 작업에 방해될까 많은 질문은 하지 않은 채 태연한 듯 기다려 주었으나 초조한 심정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나 또한 엄청난 압박감에 짓눌린 채였다.
 

구세주는 다마스를 타고 왔다. 우리의 퀵맨께서 6볼트 점화코일을 싣고 현장으로 달려와 준 것이다. 옥윤(전지현 분)과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을 태운 호송트럭을 호위하는 일제 헌병대의 모델 A 두 대가 하와이 피스톨의 분신인 영감(오달수 분)의 습격을 받으며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촬영한 것이다.
 

포드 모델 A는 전진 3단 후진 1단의 수동변속기로서 요즘의 차와 운전법이 같지만, 기어들의 조합(유성기어 방식)으로 구동되는 자동변속기를 갖춘 포드 모델 T는 운전 방식이 독특하다. 발로 클러치 페달을 단속하며 변속 막대로 변속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과 후진을 포함한 모든 변속을 페달로 해야 한다. 가감속은 스티어링 휠에 달린 스로틀 레버가 담당한다. 이 때문에 모델 T를 모는 배우들에게 운전법을 알려주면 한결같이 신기해하고 재밌어했다. 이 차는 강인국 집 앞에서의 링컨 K 수리공들의 출장차, 주유소에서의 폭파작전의 사전 답사차 등으로 등장한 후 모습을 바꾸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도 등장한 바 있다.
 

링컨 K는 당대 포드의 기함이었다. 당시 400달러(약 47만6천원) 남짓인 모델 A의 열 배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 링컨은 1936년 약 280대 가량의 모델 K를 만들었는데 현존하는 차는 10대 미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람하면서도 품격 있는 스타일도 멋지지만 후드 밑에 놓인 V12형 엔진의 자태는 정갈하며 화려한 조형성을 뽐낸다. 시동이 부드러운 데다 아이들링은 요즘의 고급차 못지않게 정숙하여 당시의 기술에 대한 경외감이 들 정도다. 참, 이 차의 후드에 붙어 있는 마스코트는 그레이하운드, 사냥개다. 재규어, 즉 고양이로 착각하여 이 차를 재규어라 칭한 사례를 본 적이 있다.
 

주유소에서 덕삼(최덕문 분)의 폭탄 투척으로 공증에 붕 뜨며 뒤집어지는 모델 K, 사실 이 장면이 CG의 힘을 빌리지 않고 실사로 진행할 뻔했던 위기가 있었다. 최동훈 감독이 진짜 링컨 K를 터뜨려 찍자는 폭탄급 제안을 한 것이다. 역시 통 크게 영화 만드는 감독이다. 내 속이 터질 뻔했다. 다행히 대역차의 희생으로 이 차는 생존할 수 있었다.
 

링컨 K는 80 노구에도 불구하고 열을 잘 받는 성격이어서 현장에서 애를 태운 적이 많았다. 영화 촬영의 특성상 탁 트인 길을 시원하게 달리기보다는 세트 안에서 짧게 주행하고 시동을 켠 채로 대기하는 일이 잦았다. 더구나 조명, 카메라, 발전기 등을 붙인 채로 말이다. 12기통의 엔진이 계속 공회전만 하는 것은 차에게도 지켜보는 나에게도 고역이었다.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엔진룸의 온도가 매우 높이 치솟는다. 이런 때에 시동을 끄면 연료라인의 휘발유가 끓어 증기가 생기고 이 증기가 연료관 속에서 연료의 흐름을 막아 시동이 걸리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곤 했다.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으나 관련 자료들을 뒤지다 보니 이런 현상이 동 모델의 고질적인 증상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더하여 이 차의 직류발전기(제너레이터)는 공회전 중에는 발전량이 충분치 않다는 것도 알게 되어 이에 대한 대응도 하게 되었다.
 

관절염에 동맥경화, 호흡 부전 증세까지 있는 80년 넘은 차들로 과격한 추격, 총격 등의 액션 신을 무탈하게 찍어낸 것은 순전히 영화 만들기에 미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 덕분이다. 촬영은 한겨울의 야외 세트에서 대부분 진행되었다. 그들은 하루치 촬영이 끝나면 천막으로 차고를 짓고 엔진에 모포를 덮어 낡은 차가 추위에 지치지 않도록 돌보아 주었고 연료도 고급휘발유로만 주유하여 고령의 차에 대한 예우를 다해 주었다. 링컨 K가 시동이 잘 안 되어 애를 먹으면 너나없이 달려와 2.8톤의 몸체를 밀어 시동을 도와주던 그들이 결국 천만 영화를 만들었다. 그 스크린 속을 종횡무진 누비던 넉 대의 포드는 한국에서 두 번째의 겨울을 맞을 것이다. <암살>의 DVD가 출시하면 약속대로 미국의 전 차주들에게 하나씩 사서 보내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언제쯤 우리의 도로에서도 번호판을 붙이고 당당하게 달리는 클래식 카들을 볼 수 있을까? 이런 차들의 도로주행을 허용치 않음으로써 이들이 가져올 문화의 풍성함과 다채로움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 안타깝다.

글 · 김남진 (카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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